천도교 제3세교조 의암성사(義菴聖師)는 포덕 2년(1861) 4월 8일 청주 근교 대주리에서 탄생하시었습니다. 성은 손(孫)씨요 이름은 병희(秉熙)요 어렸을 때는 응구(應九)라 하였으며 아버지 이름은 의조(懿祖)요 어머니는 최씨입니다.

의암성사는 타고난 기질과 성품이 비범하고 영매(英邁)하며 바다와 같은 도량을 지녔었습니다. 의협심이 남달리 강한 성사는 젊은 시절에 호방하고 의로운 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당시 부패한 세상에 실망한 나머지 한낱 낭인생활로 울화를 풀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던 의암성사는 뜻한 바 있어 22세 때에 동학에 입도한 그날부터 방탕하던 생활을 일체 청산 하시고 매일 주문 3만독을 외우며 짚신 두 켤레 삼는 것을 일과로 하면서 수도에 전념하셨습니다. 다음해부터 의암성사는 해월신사의 직접 가르침에 따라 수련을 쌓으면서 이곳저곳 숨어다니셨는데 극도의 곤궁과 위험이 잇따르는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초인적인 용기로써 이겨내셨습니다.

포덕 35년(1894년)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의암성사는 해월신사의 명을 받들어 동학군의 통령 (統領)이 되어 전봉준과 합세하여 민족자주의 대의를 밝히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동학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패배를 당한 후 의암성사는 해월신사를 모시고 강원도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포덕 38년(1897년) 12월 24일에 의암성사는 해월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으시어 천도교의 제3 세교조가 되셨습니다.

이듬해 해월신사가 순도하신 후 의암성사는 그 뒤를 이어 동학혁명으로 흩어진 교인들을 수습하기에 힘쓰셨습니다.

그후 급변하는 내외 정세의 풍운 앞에 날로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방관 좌시할 수 없어, 더욱 원대한 뜻을 품고 외국의 선진 문물과 동양 대세를 살필 필요성을 절감하여 해외(海外)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포덕 42년(1901년) 장도에 오른 의암성사는 먼저 일본을 거쳐 중국 상해에 들러 국제 정세를 살피신후 일시 귀국하셨다가 다음해 3월에 일본에 유학시킬 학생 24명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청년자제들의 교육에 힘쓰셨습니다. 이때 이름을 이상헌(李祥憲)이라 바꾸어부르면서 당시 일본에 망명중이던 권동진, 오세창, 박영효 등 여러 우국지사들과 만나 시국을 논하고 제휴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40명의 학생을 본국에서 소집하여 일본에 유학케 함으로써 뒷날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포덕 44년(1903년)에 이르러 전국에 포덕이 늘고 특히 서북 지방으로 교세가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노일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감한 의암성사는 이 기회를 계기로 나라의 독립 기초를 굳게 다지는 국민의 의식개혁을 기하기 위해 개화혁신운동을 전개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용구 등 일부 배교분자들이 친일행위를 자행하게 되자 의암성사는 크게 분개하시어 포덕 46년(1905년) 12월에 「동학」을 「천도교」라 선포하시고 「천도교」와 「일진회」관계를 일체 끊게 하시고 포덕 47년(1906년) 1월에 귀국하시어 「천도교 중앙총부」를 서울에 설치하신 후 매국노 이용구 등 일당 60여 명을 출교처분하셨습니다.

의암성사는 그해 각 지방에 280개의 지방교구를 설치하시여 근대적인 종교체제를 갖추어 나갔습니 다. 그리고 「만세보(萬歲報)」라는 일간 신문을 발행하였는데 이 신문은 항일 언론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우리 나라 최초의 신소설을 연재하는 등 한국 언론 발전과 문학사적 신기원을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포덕 49년 1월 18일 의암성사는 춘암상사에게 대도주의 종통을 선수하시고 그 후 춘암상사로 하여금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 경향 각지에 수많은 학교를 경영케 함으로써 육영사업을 통하여 힘을 키우는데 주력하셨습니다.

포덕 51년(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의암성사는 통분함을 금할 수 없었으나 마음을 굳게 다지시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와신상담, 국권회복의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이리하여 의암성사는 포덕 52년(1911년) 5월에 보성학교 학생 2백여명을 거느리고 경주 용담의 천도교 발상지를 순례하시는 한편 다음 해에는 우이동에 봉황각을 세우시고 수년간 이곳에서 7차에 걸쳐 연 343일간 전국의 지도자급 교역자 483명을 수련시키셨는데 후일 이들이 각 지방에서 3·1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전후에 민족자결주의 조류가 세상을 휩쓸었습니다, 의암성사는 포덕 60년(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내외의 여러 지사와 더불어 거족적 독립운동을 주도하시게 되었습니다.

의암성사는 3·1운동의 영도자로서 서대문 감옥에 수감당하여 심한 고문으로 인하여 병보석중 포덕 63년(1922년) 5월 19일 62세를 일기로 환원하셨습니다.

의암성사는 일생을 온갖 역경과 풍운 속에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역사를 움직이시고, 동학을 천도교로 현도(顯道)하시고, 교육, 언론, 문화 창달에도 선구자적 활동을 보이셨습니다.

또한 의암성사는 인내천(人乃天)의 천도교 종지를 밝히시고 각세진경(覺世眞經), 수수명실록(授受明實錄), 명리전(明理傳), 삼전론(三戰論), 천도태원경(天道太元經), 무체법경(無體法經), 이신환성(以身換性), 인여물개벽설(人與物開闢說) 등을 비롯한 수많은 법설을 남기셨습니다. 특히 「삼전론(三戰論)」에서는 도전(道戰), 재전(財戰), 언전(言戰)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천년에 대일변(大一變)하고 백년에 중일변(中一變)하고 십년에 소일변(小一變)」한다는 「삼변설(三變說)」을 설파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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