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말기에 부패한 정부 당국은 동학을 이단(異端)으로 몰아 닥치는 대로 잡아 처형하는 극심한 탄압을 가하였습니다. 이에 동학은 비폭력으로 저항하여 대신사의 신원(伸寃) 요구를 통해 신앙의 자유와 아울러 정치의 개혁과 외세 배격 등을 주장하는 집단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한편 고부에서는 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이 극심하여 마침내 동학 접주 전봉준이 앞장서서 포덕 35년(1894년) 갑오년 1월 10일(음)에 수천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를 평정하기 위해 당도한 안핵사(按 使) 이용태는 무고한 백성을 동학당으로 몰아 잡아 매질하고 민재를 약탈하며 불지르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마침내 동학은 혁명의 기치를 올리고 고부의 전봉준을 비롯, 무장의 손화중, 태인의 김개남, 금구의 김덕명 등 각지의 접주들 주도하에 고부 백산에 동학군이 모이게 되었습 니다.

갑오년(1894년) 3월 21일(음) 드디어 동학혁명의 횃불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동학군은 격문, 창의문, 행동 강령 등을 내세우고 동도대장(東徒大將) 전봉준을 선봉으로 오색의 각 포별 군기를 휘날리며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양척왜(斥洋斥倭)를 표방하고 일제히 궐기했습니다.
동학군이 고부로 진격하자 안핵사 이용태는 도망가고 동학군은 고부 백산을 본거지로 대오를 정비하여 태인과 부안을 점거한 후 도교산으로 이동하였다가 4월 7일(양 5월 11일)에 황토현에서 대승을 올리고 10 여일 만에 정읍, 흥덕, 고창을 점거하였습니다.

동학군은 무고한 백성에게 피해가 없도록 12개조 군률을 세워 군기를 엄하게 하였으므로 가는 곳 마다 민중의 호응을 받고 그 세력이 날로 증가하여 연이어 무장, 영광, 함평을 점거하고 4월 23일 에는 장성의 황룡촌(黃龍村) 접전에서 홍계훈(洪啓薰)의 경군(京軍)을 대파하였습니다. 드디어 동학군은 4월 27일 전주를 점거함으로써 호남 일대를 장악하여 서울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관군은 병력 부족을 조정에 호소하고 나약한 조정 대신들은 청국에 원병을 청하는 민족 반역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청국군 2천여 명이 5월 5일과 7일에 아산에 상륙하고 일본군 또한 7천의 군사가 5월 6일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주했습니다. 이 때 동학군은 전주에 입성하여 호남 일대를 제압하고 서울로 북상하려다가 청·일 양국군 개입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하여 북상을 중단하는 동시에 관군과 협상을 개시한 끝에 폐정개혁안 실행과 동학집강소(執綱所)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성립시키고 5월 8일에 전주를 관군에게 양도하였습니다.

당시 동학군의 12개조 폐정개혁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도인과 정부 사이에 오래 끌어온 혐오의 감정을 씻어 버리고 모든 행정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일일이 엄중하게 징계할 것.
③ 횡포한 부호들은 엄징할 것.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은 징계할 것.
⑤ 노비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
⑥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평량갓은 벗겨 버릴 것.
⑦ 청춘 과부의 재가를 허용할 것.
⑧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할 것.
⑨ 관리 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⑩ 왜적과 간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⑪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돌릴 것.
⑫ 토지는 평균하게 나누어 경작케 할 것.

이 폐정개혁안은 우리 나라의 주체적 근대화의 시발로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전라도 53개 군에 동학집강소가 설치되어 민정이 실시되면서 봉건적 낡은 제도의 과감한 쇄신을 보였습니다. 이와 같이 근대화의 제개혁이 평화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한반도를 무대로 청·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세는 일본군의 우세로 기울어지고 일본군은 재빨리 고종을 사실상의 포로로 하여 일본의 괴뢰내각을 출범시켜 소위 갑오경장(甲午更張)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본군의 침략 사실이 동학군에 전해지자 동학군은 무장을 다시 가다듬고 전주를 재점령하고 북상을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9월 18일 해월신사는 전국의 동학 교도들에게 충청도 옥천 청산(靑山)으로 모이도록 하여 대일 항전의 총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이리하여 동학군은 전국에 걸쳐 339 지방의 포(包)가 동원되고 수십만의 대군을 형성하여 삼남 일대와 충청도 동남부를 장악했습니다. 10월에 이르러 논산에 동학군 주력부대가 집결하여 공주를 향해 북상하였습니다.

동학군은 목천(木川) 세성산 싸움에서 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주력 부대는 공주 이인역 옥녀봉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봉황산에 이르러 10월 22일부터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대혈전을 개하였습니다. 공주 우금티 전투는 무려 사오십 차례나 우금치 고개를 뺏고 빼앗기는 시산혈해(屍山血海)의 대혈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동학군은 일본의 막강한 신무기와 화력을 당할 수 없어 11월 11일 우금치 고개를 시체로 메우고 천추의 한을 남긴 채 처참하게 패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동학을 뿌리째 없애려는 의도로 악착같이 추격하여 무차별 토벌을 감행하였습 니다. 이리하여 동학군은 충주·홍천·하동 그리고 황해도와 평안도 상원 등 도처에서 줄기차게 일어나 싸웠으나 처절한 전투 끝에 무려 30여만의 무참한 희생을 내고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포덕 39년(1898)에 해월신사가 체포당하여 72세의 고령으로 교수형을 받으실 때 "나 죽은 후 10년 안에 장안에 동학의 주문 소리가 크게 울리리라." 하시니 비록 갑오동학혁명은 왜병의 총칼 앞에 무참히도 좌절되었지만 그 정신은 끊이지 않아 10 년후 갑진년(1904)에 동학의 개화혁신운동이 일어나고 다시 기미년(1919) 3월 1일에는 항일 독립 운동의 함성이 방방곡곡에 울려퍼졌던 것입니다.

이 동학혁명은 반봉건 반침략주의의 기치 하에 거사한 근대적 민주화의 혁명이었으며 근대적 통일 민족국가를 추구하는 위대한 민중 혁명으로서의 근대적 민족사의 시발로서 새로운 역사의 장(章)을 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학혁명의 횃불은 꺼지지 아니하는 불길로서 당시 좌절당한 것 같지만 그 정신은 계속 살아서 동학의 후예들이 연이어 일어나 독립 만세의 함성을 울리게 되었습니다.

 

Copyright © 2004 chondobs, all rights reserved.